사람마다 각자의 삶의 여정(旅程)에서 어설프고 미숙하나마 풋풋하고 순수했던 한 시절이 왜 없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현재의 자기 위치와 직결되었던 아니 되었건간에 때로는 그때를 되새김하며 그것의 의미를 다시 해석해 보게도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이미 지나와 버린 당시의 상황에 잠시 스톱워치를 누르고 현재의 자신으로 귀결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여러 가정(假定)․대안(代案) 그리고 분기점을 설정해 보게도 된다.
한번은 몸시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줄거리 구성이나 상황전개에 전혀 논리성도 없고 전․후 맥락이 잘 맞지 않는 엉터리 꿈이었건만 등에 땀이 쭉 난 것으로 보아 그 꿈속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어 어지간히 진지하게 생각하고 느꼈던 모양이다.
해묵은 때가 오래 흡착되어 바닥 나무결의 색깔이 까므스레하게 변한, 그러나 정성껏 닦고 닦아 반질거리는 좁다란 툇마루. 나는 그 마루의 디딤돌 위에 놓인 구두의 신들매를 매고 있었고, Y의 어머님과 동생이 옆에 서 있었다. ‘왜 그렇게 일찍 떠나느냐’고 그들이 묻는 것 같았고, ‘멀리, 더 가볼 데가 있다’고 대답한 것 같았다. 그야말로 황당한 픽션형 꿈이었지만, 깨고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손때가 묻어 더욱 반질거리는 검정색 직사각형 가죽 케이스에 싸인 조그만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댕그라니 놓여 있는 화장대 옆에서 그녀는 뜨개질을 부지런히 했고, 나는 유리컵에 따르진 삼성사이다를 조금씩 나누어 마셨다.
어느 이른 봄, 휴가로 고향집으로 가며 잠시 Y의 집에 들렀던 때의 한 장면이다.
어느 땐가는 Y가 느닷없이 서울로 왔다. 아현동 외삼촌 댁에 간다던 그녀의 말이 참인지 아닌지를 나는 알지 못하지만, 통금으로 갇혀버려 밤을 지새야 했던 유난히도 무덥던 그 한여름 밤의 회동(會同)과 대화는 너무나 평범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주는 시그널은 아둔한 내게도 느껴오는 바가 있었다. 무언가 답해야 될 절박감이 질퍽하게 머릿 속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몸은 말뚝에 매인 듯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애꿎은 세월만 자꾸 흘렀었다.
그 해 여름도 거의 다 가고, 영내(營內) 뒷산 기슭의 오리나무 잎 빛깔이 누르스럼하게 변색될 무렵의 어느 저녁. P․S판을 밟으며 영내 이곳 저곳을 순찰하던 작업복 차림의 풋내기 소위. 아, 그 오리나무 숲 사이로 불쑥 둥근 달이 떠올라 있었고, 달 속에 두 사람의 얼굴이 함께 클로즈업되었다―Y와 K.
두 사람은 다 내 외로운 영혼에 진정으로 따스하게 다가와 준 고마운 분들이다. (하느님, 저는 압니다. 이 두 사람 모두 제게는 과분한 사람인 것을. 이들을 떠나서 저는 잘될리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왜 이들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좀 더 흐르는 세월에, 당신의 섭리에 맡겨 볼까요. 그러나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지도 모릅니다. 흐르는 세월에, 기약없는 불확실한 미래에 맡겨둘 일이 아닌 것을 잘 알면서 말입니다.)
영민한 Y는 글 속에서 장래를 꿰뚫는 의미깊은 예지를 언뜻 언뜻 내비치고 있었다. 결혼이나 애정 문제를 염두에 둔 말 같은데, “어느 땐가는……그것은 비극이 되겠지요.”라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본 것 같은 그런 운명론자적 구절이 있었다. 일방적이어서는 안될 사안에서, 일방적인 것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의 결과를 우려하는―어쩌면 그런 결과를 예견하는 말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렇게 용기있게 나를 찾아준 데 대한 답례로 이듬해 늦은 봄, 그녀가 근무하는 직장으로 찾아갔을 때, 속살이 살짝 비쳐질 것 같이 결 고운 하얀 티씨 혼방 블라우스와 섶이 무릎 아래로 약간 내려간 진남색 스커트 차림에 그렇게나 환하고 밝게 반겨주던 Y. “곧 일 끝나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시원한 맥주 사 드릴께요”하던 그녀의 호의를 왜 굳이 사양하고 훌쩍 떠나왔을까.
그 후로도 나는 무심한 세월에만, 능동성․주체성이 상실된 채 세월의 물결속을 허우적거리며 애꿎은 신(神)의 섭리에만 나를 맡겨 두고 말았다. 십 수년이 흘러 들은 바로는, 지금은 멀리 딴 하늘 밑 어느 곳에 가 산다고 한다. 어쩌면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혹시나 나의 그때의 모호하고 이상스러운 태도가 여러 몫 중의 하나로 작용하지나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내게 사주마 했던 「시원한 맥주」라는 말 속에 담긴 액센트와 뉘앙스가 지금에사 내 마음에 큰 울림 진한 파장으로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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